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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스토리) 노예를 최초로 해방시킨 사람은 링컨 대통령이다?

by 하프투테이크 2023.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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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을 때, 이 나라는 자유의 상징으로 유명해졌다.

 

이들이 일으킨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세금 문제였지만, 그 배경에는 '대표 없이 세금 없다' 는 원칙과 더불어

 

본국으로부터 억압받고 자유를 구속당하는 식민지 주민들의 반감이 있었던 것이다.

독립을 함으로써 이들은 마침내 국가 권력의 압제를 벗어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던 약 250만 명의 사람들 중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사람은 약 200만 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왜 자유와 독립을 누릴 수 없었을까?

 

노예에게 자유는 없다

 

이들 50만 명은 바로 식민지 남부 지방에서 살고 있었던 흑인 노예들이었다.

 

버지니아를 비롯한 남부 지방에는 식민지 시기부터 담배나 벼를 재배하는 많은 대농장이 있었는데,

 

이들 대농장들은 흑인 노예를 주 노동력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미국 독립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도 바로 이 버지니아에 자신의 것과 아내의 것을 합쳐 22,000에이커(8,900헥타르)의 땅과

 

3,000명이 넘는 노예를 가지고 있었으며, 후에 제 3대 대통령이 된 토마스 제퍼슨도 200여 명의 노예를 가진 대농장주였다.

 

하지만 이들은 자유와 평등을 소리 높여 외치면서도 흑인 노예의 해방과 권리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흑인에게는 정치적 권리는 커녕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조차 인정하지 않았으며,

 

자유를 누릴 가치가 없는 존재로 여겼다.

 

노예의 해방에 대해 먼저 언급함으로써 선수를 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압제자'인 영국 측이었다.

 

국왕 폐하의 이름으로 흑인을 해방한다!

 

혁명이 본격적으로 발발한 1775년,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시작된 기운이 중 - 남부로 번져나가자 

 

버지니아 주의 총독으로 재임하고 있던 던모어 경은 혁명운동을 타도하기 위해 한 가지 수단을 생각해냈다.

 

독립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노예들을 부추겨 영국 편에 붙게 함으로써 식민지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영국군을 지원하는 인적자원을 늘이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775년 11월 7일, 던모어 총독은 아래와 같은 '던모어 노예해방선언'을 발표하게 된다.

 

"반역자에게 소속되어 있는 모든 고용인, 하인, 흑인들은 자유이다. 폐하의 왕관과 위엄에 자신의 의무를 바치고,

 

폐하의 군대에 참가하는 자에게는, 즉석에서 자유가 부여된다."

링컨의 노예해방선언보다 88년이나 앞섰던 이 노예해방선언은 링컨의 노예해방선언과 

 

완벽하게 같은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1863년 1월 1일자로 발표되었던 링컨의 노예해방선언 역시 반란을 일으킨 남부의 군사, 경제적 기반을 

 

파괴하기 위해 벌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그 의도가 도덕이나 종교적 고려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순전히 정치적이었으므로, 영국에 충성하는 왕당파 소유의

 

노예에게는 적용되지 않았고 노예의 매매와 소유도 여전히 합법이었다는 점 역시 링컨의 노예해방선언과 마찬가지였다.

 

링컨의 노예해방선언 역시 연방정부에 대항하고 있는 주의 노예만 해방 대상으로 했으며,

 

연방 편에 서거나 연방군에게 점령된 주의 노예는 적용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던모어 선언의 여파

 

던모어 총독의 선언은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다.

 

식민지인들이 보유하고 있던 노예들 중 상당수가 탈주하여 영국 편으로 갔는데,

 

그 숫자가 무려 10만 명에 달했다.

 

그 중에서 2만 명은 아예 영국군에 입대했고, 

 

대부분은 비전투임무를 수행했지만 일부는 총을 들고 식민지군과 직접 전투를 벌이기도 햇다.

던모어는 이들 흑인 지원병들을 모아 별도로 연대를 편성하고 '에티오피아인 연대' 로 명명했다.

 

하지만 이런 조치는 실제적인 효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식민지인들의 게릴라전으로 영국군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여기에 천연두까지 유행했던 것이다.

 

제대로 된 면역이 없었던 데다 안전한 거점기지가 없어 배 위에서 숙박하던 에티오피아인 연대의 천연두 피해는 

 

심각한 지경이었고, 결국 던모어 총독은 버지니아를 포기하고 1776년 7월에 완전히 철수했다.

물론 식민지 측에서도 흑인을 전혀 활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일부 노예 소유주는 자신이 직접 병역을 수행하는 대신 자기 소유의 흑인을 입대시키기도 했고,

 

영국군의 흑인해방선언에 자극을받은 워싱턴이 자기 휘하의 대륙군에서 일정 기간 복무를 마친 흑인에게는 

 

자유를 주겠다는 포고령을 내린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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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미국독립혁명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백인의 권리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흑인 노예들의 권리는 계속해서 무시되었고, 영국군에 참가했던 노예들은 캐나다로 가서 자유 속에서 삶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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