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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스토리) 우리가 아는 히틀러는 그의 전부가 아니다?

by 하프투테이크 2023.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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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20세기 최악의 정치가로 불리는 사람 중 수위권을 달리고 있다.

 

히틀러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직접적인 책임자이자 전쟁 중 일어난 수많은 전쟁범죄의 책임자로서

 

악질 독재자의 표상으로 불리고 있다.

 

그런데 이런 자리에 오르기까지 겪은 인생 역정에 대해서는 의외로 가려진 부분이 많다.

 

화가가 되고 싶었던 히틀러

 

1889년 태어난 히틀러는 어머니가 낳은 여섯 아이들 중 넷째였다.

 

손위의 형제들이 모두 일찍 죽었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는 어렵게 얻은 아들을 애지중지했다.

 

이에 반해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상당히 엄격한 성격이었는데, 아들에게도 안정된 삶이 필요 하다고 생각하고 

 

공무원 시험을 보도록 했다. 하지만 화가가 되고 싶었던 히틀러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살기를 거부해서

 

부자 사이는 상당히 나빴다.

억지로 중학교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성적은 지극히 불량했고, 말 그대로 최하위권에서 밑바닥을 기었다.

 

그러던 참에 아버지가 죽자 히틀러는 어머니를 설득하여 학교를 그만두고 파리로 갔다.

 

1년 정도 파리를 헤매며 미술가의 꿈을 다시 불태운 히틀러는 빈으로 돌아와서 미술학교에 입학하려고 했으나

 

연달아 불합격했다.

불합격의 경정적인 이유는 그의 그림이 너무 사실적인 묘사에 치중하여 예술적인 맛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사진이 발명되어 사실적인 면만 파고드는 그림은 더 이상 가치가 없엇던 것이다.

 

이때 채점을 담당했던 교수들 중 하나는 히틀러의 그림 그리는 기술 자체는 괜찮다고 보아 회화과보다는

 

건축학과에 시험을 쳐 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히틀러의 풍경화에는 사람이 없었고, 후에 어쩌다 사람을 그린 경우에도 중점적인 묘사는 건축에 맞춰져 있었던 것이다.

 

다른 채점관들도 히틀러의 그림은 일반적인 회화보다는 건축조감도 같다는 평을 했을 만큼,

 

만약 히틀러가 건축학과에 진학했다면 뭔가 괜찮은 결과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이 조언을 들은 히틀러 자신도 솔깃했었다. 하지만 문제는 히틀러의 학력이었다.

빈 미술대학 건축학과는 고등학교 졸업 학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중학교를 중퇴한 히틀러에게는 

 

지원 자격이 없었던 것이다.

 

자기 화풍에 집착하고 있던 히틀러로서는 회화과의 선발기준에 맞도록 그림 그리는 습관을 바꿀 의사도 없었고,

 

결국 화가의 꿈을 포기한 채 빈의 노동자 합숙소에서 기거하며 아르바이트로 그림을 그리는 처지가 된다.

 

오스트리아가 아닌 독일 군대에 입대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1년 전부터 독일 뮌헨에 살고 있던 히틀러는 환호했다.

 

그는 전쟁을 일상에서의 탈출로 여겼고, 독일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의례로 여겼기 때문이다.

 

역설적인 것은 그가 자신이 태어난 조국이었던 오스트리아 제국의 육군 소집영장에는 응하지 않았었다는 점이다.

 

오스트리아군 당국은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히틀러에게 두 번이나 징집영장을 보냈으나 

 

그는 입대하지 않고 독일로 도망쳤다.

후일 밝혀진 바에 의하면 여러 민족이 뒤섞인 다인종 국가인 오스트리아 제국을 위해 군복무를 할 수 없었다고 하는데,

 

오스트리아군 당국도 결국 그에게 병역면제 처분을 내렸다.

 

단, 이는 히틀러가 제시한 사유가 옳다고 인정해서가 아니라 병역기피를 위해 국외로 도주까지 한 히틀러의 

 

심신이 너무 미약해서 군복무를 견딜 수 없을 것이라는 판정을 내렸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국적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자원하여 독일군에 입대하게 된다.

 

흡연과 육식을 혐오한 까칠남

 

독일을 지배하는 통치자가 된 후 히틀러가 주변 사람들을 가장 괴롭혔던 것은 생활 사이클과 기호품의 문제였다.

 

기본적으로 히틀러는 지독한 올빼미형 인간이어서 매일 늦잠을 자고 밤새도록 깨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비서와 참모들은 생활 사이클을 히틀러에게 맞추느라 고생을 해야 했다.

히틀러의 연인 에바 브라운

게다가 히틀러는 1933년 이후 채식주의자가 되어 절대 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총통 사령부의 요리사는 인간은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었다.

이 요리사는 갖은 꼼수로 히틀러의 음식에 고기를 섞었고, 참다못한 히틀러는 그에게 고리를 넣으려야 넣을 수 없는

 

감자죽이나 보리죽 같은 음식만 만들게 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와 같이 식사를 하는 사람에게까지 고기를 먹지 못 하게 하지는 않았다.

 

담배에 대한 히틀러의 태도는 고기 문제보다 더욱 강경했다.

금연법 따위를 제정하지는 않았으나 그 누구도 히틀러 앞에서는 어떤 종류의 담배도 피울 수 없었다.

 

심지어 히틀러는 크리스마스에 자기 이름으로 전 장병들에게 나가는 선물상자에서 담배를 빼고 

 

초콜릿과 술만 넣으라는 명령을 내렸고, 병사들이 분명히 초콜릿과 담배를 교환할 것이므로 소용없다고 

 

측근들이 진언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히틀러가 마침내 자살로 생을 마감했을 때, 그동안 모셔오던 총통의 시체를 화장한 측근들이 

 

방공호로 돌아와 제일 먼저 한 일은 시원하게 담배부터 한 대 피운 것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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