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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스토리) 사무라이와 마주치면 죽을 수도 있다?

by 하프투테이크 2023.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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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상징적인 문화적 코드 중 하나는 '사무라이'이다.

 

이들은 한때 인구의 10%를 차지했던 특권 계급으로, 사-농-공-상 이루어지는 신분제 피라미드의 맨 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이 대해서 잘못 퍼진 상식 중 하나는 '사무라이는 평민을 마음대로 베어 죽일 수 있다' 라는 것이다.

 

심지어 새로 산 칼의 날이 잘 드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길 가는 사람을 아무나 베어 볼 권리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과연 이것이 사실일까?

 

사무라이는 어떤 신분일까?

 

일본에서 사무라이라는 신분이 처음 나타난 것은 헤이안시대 중기 이후이다.

 

이들은 원래 지방의 토호나 유력 농민의 자제 중에서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자 또는,

 

사냥꾼이나 어부 등 비농민 출신자들 이었는데, 자체적으로 무장하여 세력을 형성했다.

 

그리고 수도인 교토의 귀족층이 자신들 간의 싸움에 이 지방 무사들을 동원하면서 차츰 중앙 정계로 진출하게 된다.

이후 사무라이는 귀족 대신 권력을 잡고 막부를 수립하여 일본에서의 무사정권시대를 열게 된다.

 

첫 막부를 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서부터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에 이르기까지, 

 

676년에 걸쳐 일본을 지배한 것은 명실공히 사무라이라는 계급이었다.

 

사무라이는 사람을 마구 죽여도 됐을까?

 

무사인 사무라이가 지배층이다 보니, 이들이 무력을 앞세워서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 해치울 수 있다는 인식이 퍼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사무라이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가 '사무라이는 지나가는 양민을 아무나 베어 죽여도 벌을 받지 않았다' 라는 인식이다.

 

실제로, 사무라이가 아무 잘못도 없이 지나가는 사람을 습격해서 베어 죽이는 행위가 자주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특히 전국시대에서부터 에도시대 전기에 걸쳐 빈발했던 이런 행위를 '츠지키리(辻斬り((つじぎり)))라고 하는데,

 

무사들이 이런 짓을 저질렀던 이유는 다양했다.

 

새 칼의 날이 잘 드는가를 시험하기 위해서 사람을 베기도 했고, 그저 재미로 저지르거나 무술 수련을 위해,

 

심지어 금품을 강탈하기 위해 저지르기도 했다.

이런 경우는 그저 강도에 불과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전국시대 당시에 이런 행위가 빈발했던 것은 말 그대로 질서가 잡히지 않은 혼란기였기 때문이다.

 

전국시대는 힘이 곧 정의였고, 칼을 쥔 무사의 행동에 제약을 가할 존재는 없었다.

 

강한 힘을 가진 영주들도 다른 영주와의 항쟁을 위해 더 많은 무사들을 자기 휘하로 끌어들이는데 노력했을 뿐,

 

그들이 저지르는 소소한 비행에까지 주목할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천하가 통일되고 치안 확보의 필요성이 커지자 마구 사람을 죽이는 츠지키리의 관습에도 제약이 가해졌다.

 

도요토미가를 무찌르고 자신의 막부를 수립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동안 묵인되던 츠지키리에 대한 전면금지를 선언했고, 

 

무사가 무단으로 사람을 죽인 경우에는 살인으로 처벌을 받았다.

 

체면이 사람 목숨보다 중요했던 사무라이 세계

 

에도시대라고 해서 하층계급에 대한 무사의 살인이 법적으로 완전히 금지된 것은 아니었다.

 

무사가 상공업자나 농민 등 하층민에게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해 체면을 잃은 경우에 한해 

 

상대를 죽여 명예와 위엄을 지킬 수  있었는데,

 

이때 무사는 정당방위를 한 것으로 간주되어 어떤 처벌도 받지 않을 권리가 있었다.

이를 '기리스테고멘(切捨御免, 斬捨御免, きりすてごめん)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람을 벨 권리가 있다고 해서 그 권리를 아무 때나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먼저, 분명히 모욕을 당했다는 증인과 증거가 필요했다.

 

그런 증거가 없을 시에는 단순한 살인으로 취급되어 최악의 경우 참수형에 처해졌다.

또한 일이 다 끝난 뒤 복수하는 것도 금지였다.

 

발생 당시에는 별 반응 없이 넘어갔던 일을 나중에 들추어 상대를 죽인다면, 의도성이 있는 살인 범죄로 취급받았다.

 

더불어 상대를 죽인다고 해도 상대 개인에 대한 공격으로 끝나야지,

 

가족이나 재산 등 상대의 몸 이상의 피해를 입히는 것도 금지였다.

그리고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살인을 한 무사는 곧바로 관청에 

 

자신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사람을 죽였음을 알려야 했다.

 

관청에서 증거와 증인을 바탕으로 사건의 합법성 여부를 판단하는 기간 동안 칼은 증거품으로 압수되었고,

 

무사 자신도 20일 이상 자택에서 근신하여 나오지 않는 것이 상례였다.

정당한 행위로 인정되면 칼을 돌려받았고, 그 이상의 처벌은 더 이상 받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사람목숨을 파리목숨으로 생각하는

 

제 정신이라고는 할 수 없는 방침과 사상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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