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스토리

(스토리) 링컨은 왜 흑인 노예의 해방을 주장했을까?

by 하프투테이크 2023. 3. 10.
728x90
반응형
SMALL

반응형
SMALL

1862년 9월 22일, 남군과의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아메리카 합중국의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전 세계를 향해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발표했다.

 

현재 진행 중인 반란에 가담한 남부의 11개 주가 1863년 1월 1일까지 연방에 복귀한다면 죄를 용서하지만,

 

계속 연방정부에 반항하면 그 벌로 이 주들의 노예를 모두 해방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남부의 주들은 이 명령에 따르지 않았고, 그 결과 공식적인 노예해방선언이 발표되었다.

 

그렇다면, 링컨은 처음부터 노예해방을 목표로 한 활동을 해 왔을까?

 

노예 해방에 대한 링컨의 진짜 의도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와 달리, 링컨은 애초에 노예해방론자가 아니었다.

 

그는 노예제도를 나쁜 것이라고 여기기는 했지만 노예해방을 최고 우선 정책으로 펼 생각은 없었다.

 

링컨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연방국가로서 미국의 정치체제를 유지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서 도움이 된다면 노예제도 따위는 얼마든지 용인할 수 있었다.

심지어 링컨은 흑백 혼합조차 탐탁지 않았으며, 공개석상에서 흑인들을 죄다 아프리카로 돌려보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한 적도 있었다.

 

게다가 흑인과 백인을 진정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북부에서도 소수였으며,인종차별적인 시각은 북부에서도 심했다.

 

연방정부가 자원병만으로는 전선에서의 병력 수요를 충당할 수 없어 징집을 실시하자,

 

흑인 따위 때문에 죽으러 갈 수 없다는 징병 반대  폭동이 일어나는가 하면 그 와중에 다수의 흑인들이 린치를 당했다.

게다가 전쟁에 참가하겠다며 스스로 군대에 지원한 흑인 병사들은 백인 병사의 절반밖에 안 되는 급료만 받아야 했다.

 

그렇다면 링컨은 왜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해 전쟁을 했는가?

 

그것은 선후관계가 잘못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링컨은 이미 전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노예를 해방한 것이지,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았던 것이다.

 

전쟁의 시작은 사우스캐롤라이나를 필두로 연방에서 이탈한 남부의 11주가 불을 붙인 것이었다.

이들 11주는 연방정부의 통제를 거부하는 것은 물론 자기들의 영역내에 있는 연방정부군의 요새,

 

무기고 등을 잇달아 탈취했는데, 이는 충분히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으며 국가에 대한 반항이었다.

 

하지만 링컨은 이때까지도 참으면서 이탈한 주들에게 독립혁명의 정신을 따를 것과 연방 복귀를 요구했다.

 

하지만 이러한 링컨의 태도를 우유부단과 무기력함으로 생각한 남부의 주들은 한층 더 극단적으로 나갔고,

 

요새를 내주기를 거부하고 있던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의 섬터 요새에 포격을 가해 무력으로 함락시켜

 

연방 정부의 권위를 결정적으로 모독했다.

대통령인 링컨으로서는 이와 같은 반역행위를 더 이상 묵인할 수가 없었고,

 

마침내 남부를 강제적으로 제압하기로 결정하면서 남북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노예해방선언은 이와 같은 정치적 사건들이 쌓인 끝에 나온 선언이었다.

 

링컨보다 먼저 노예를 해방한 던모어 백작

 

여기서 놀라운 점은 같은 정치적 목표로 인해 노예해방을 선언한 사례가 이미 북아메리카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 의도 역시 링컨과 완벽하게 동일했다.

 

반란을 일으킨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지배자 세력이 내놓은 것이다.

 

1770년대, 북아메리카 13주 식민지에서는 식민종주국인 영국에 대해 반란이 일어났다.

당시 버지니아 식민지의 책임총독으로 재직하고 있던 던모어 백작은 독립파에 속하는 불온한 식민지인들의 준동과

 

병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방책을 생각해냈다.

 

바로 반란자들의 노예를 해방하는 것이었다.

 

"반역자에게 소속되어 있는 모든 고용인, 하인, 흑인들은 자유이다. 폐하의 왕관과 위엄에 자신의 의무를 바치고,

 

폐하의 군대에 참가하는 자에게는, 즉석에서 자유가 부여된다."

링컨보다 88년 앞선 1775년 11월 7일에 발표된 <던모어 노예해방선언> 역시 도덕이나 종교적 고려에서 나온것이 아니라

 

순전히 정치적이었으므로 영국에 충성하는 왕당파 소유의 노예에게는 적용되지 않았고

 

노예의 매매와 소유도 여전히 합법이었다는 게 한계였지만, 그럼에도 의미는 있었다.

 

애초에 패트릭 헨리나 조지 워싱턴, 토마스 제퍼슨 같은 '애국파' 식민지인들이 내세운 '자유와 독립' 은 

 

어디까지나 백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개념이었다.

식민지 인구의 20%(50만)에 달하는 흑인 노예들은 여전히 노예였으니, 이런 상황에서 조건부나마 흑인들에게 

 

자유를 주겠다는 버지니아 총독의 선언은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대략 10만 명의 노예가 주인에게서 도망쳐 영국 편으로 갔는데, 이 중 2만 명 정도는 영국군에서

 

비전투임무를 수행했고 실제 영국군에 가담해서 총을 들고 싸운 흑인 병사의 수도 700명 정도 되었다.

 

던모어는 이런 흑인 병사들로 '에티오피아인 연대(Ethiopian Regiment)' 라는 부대를 편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북아메리카 최초의 노예해방은 훗날 링컨의 그것만큼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식민지인들의 게릴라전과 천연두의 유행으로 버지니아 주둔 영국군은 큰 타격을 입엇고, 

 

결국 1776년 7월에는 버지니아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영국군 편에 섰던 노예들은 영국군과 함께 버지니아를 떠났고,대부분 캐나다로 가서 자유민의 신분을 가지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독립에 성공하여 자유를 얻은 미국에서는 여전히 수많은 노예가 속박의 굴레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https://halftotake.tistory.com/entry/%EC%8A%A4%ED%86%A0%EB%A6%AC-%EB%85%B8%EC%98%88%EB%A5%BC-%EC%B5%9C%EC%B4%88%EB%A1%9C-%ED%95%B4%EB%B0%A9%EC%8B%9C%ED%82%A8-%EC%82%AC%EB%9E%8C%EC%9D%80-%EB%A7%81%EC%BB%A8-%EB%8C%80%ED%86%B5%EB%A0%B9%EC%9D%B4%EB%8B%A4

 

(스토리) 노예를 최초로 해방시킨 사람은 링컨 대통령이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을 때, 이 나라는 자유의 상징으로 유명해졌다. 이들이 일으킨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세금 문제였지만, 그 배경에는 '대표 없이 세금 없다' 는 원칙과 더불어 본국

halftotake.tistory.com

 

728x90
반응형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