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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스토리) 빠진 이를 끼우자!

by 하프투테이크 2023.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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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그리고 근대 유명한 화가들의 그림을 보면 언제나 단정한 모습의 모델들이 등장함을 알 수 있다.

 

캔버스 속의 왕이나 귀족들은 늘 단정하게 다문 입, 품위 있는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왜 늘 입을 다물고 있었을까?

 

단순히 그런 표정이 품위 있어 보이기 때문이어서 그랬을까?

이들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독일의 알브레히트 뒤러나 네덜란드의 피터 브뤼헬과 같은 작가들이

 

즐겨 그린 평민들을 모델로 한 그림에서 드러난다.

 

이들의 그림에 등장하는 평민들은 대부분 이가 몇 개씩 빠져 있는데, 

 

충치나 사고 등으로 이가 빠지는 것은 귀족이라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귀족들의 초상화가 입을 꾹 다문 상태로 그려질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진짜 이의 시대

 

평민이라면 이가 빠진 채로 살아가는 것도 별 문제가 아니겠지만, 왕후귀족쯤 되면 챙겨야 할 체면이 있는 법이다.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빠진 이를 채워 넣을 수단을 어떻게든 강구했으며, 

 

가장 인기 있었던 대체 수단은 역시 진짜 사람의 이였다.

 

언제부터 다른 사람의 이를 빠진 이 대신 끼웠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기원전 3000년경에 만들어진 이집트의 미라에서 금실로 묶은 치아가 발견된 것을 보면

 

적어도 그 이전부터 빠진 이를 대신할 새 이를 끼워 넣으려는 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새 이를 고정시키는 데 금실을 사용한 것은 금은 오래갈 뿐만 아니라 인체에 어떤 부작용도 일으키지 않는 

 

금속이라는 점이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진짜 이가 가장 유리한 점은 복잡한 가공이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원래 사람의 이니만큼 크기만 적당히 맞으면 더 이상의 가공은 필요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이를 사용하는 것이 유행이 되자 <레미제라블>의 등장인물 팡틴느처럼,

 

자신의 이를 부자에게 팔아 돈을 버는 가난한 사람들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를 뽑는 것은 제공자 스스로에게도 큰 고통과 부담을 주었으므로 수요에 비해 공급이 늘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죽은 사람의 이를 뽑아서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공동묘지를 파헤쳐 시체에서 이를 구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대량공급은 쉽지 않았다.

 

자연스레 시체를 대량으로 구할 수 있는 곳, 즉 전쟁터는 이런 이의 주요 공급처가 되었다.

1815년의 워털루전투에서 죽은 사람들의 이는 그 뒤에도 19세기의 수십 년간 유럽의 멋쟁이들에게 애용되었고,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의 이가 유럽으로 수출되기도 했다.

 

이 후 위생상의 문제 및 새로운 소재의 개발, 의치 제작기술의 발달이 이어지면서 진짜 이는 사용하지 않게 된다.

 

가짜 이의 시대

 

사실 가짜 이의 시대는 진짜 이의 시대보다 더 길었다.

 

기원전 8세기의 에트루리아인들은 코끼리 상아나 황소의 이를 깎아 인조 치아를 만들었고,

 

이것을 진짜 사람의 이와 섞어 의치로 만들었다.

하지만 고대의 치과 기술이 사라져버린 중세의 사람들은 아예 이가 빠진채로 살았고,

 

근대 초기까지도 제대로 된 의치를 만들지 못해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는 빠진 이를 감추려고 천을 접어 

 

잇몸 밑에 끼우고 다닐 정도였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 의치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시대에도 하마나 바다코끼리의 엄니를 갈아서 만든 의치는 있었다.

 

문제는 엄니 의치에는 기공이 많아서 찌거기가 끼거 변색되기 쉬웠고, 냄새도 고약했다는 것이다.

 

엄니 의치를 밤새도록 물에 담가 놓고 하루에 여섯 번씩 닦아도 냄새가 가시지 않았는데,

 

초상화 속의 조지 워싱턴이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끼고 있는 틀니에서 나는 냄새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엄니 의치는 19세기 중반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17세기에는 상아를 깎아서 명주실로 매는 의치, 금이나 은, 마노로 만들어서 냄새가 안 나는 의치도 나오기는 했다.

 

하지만 이 의치들은 값이 비싼 데 비해서 음식을 씹을 수 없을 정도로 내구도가 약했으므로

 

귀족들의 장식용으로나 쓰일 뿐 실용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18세기 말에 금이나 백금으로 된 틀에 끼우는 자기(瓷器) 의치가 나오면서 비로소

 

냄새가 안 나고 잘 맞는 의치의 사용이 가능해졌다.

 

19세기에는 고무를 다루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잇몸에 정확히 마는 주형을 뜰 수 있게 되어 보다 잘 들어맞는

 

틀니의 제작이 가능해졌다.

 

20세기에는 각종 합성수지의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보다 튼튼하고 값싼 의치의 제작이 가능해졌다.

최초로 의치 제작에 사용한 합성수지는 셀룰로이드였는데, 플라스틱 수자의 일종인 셀룰로이드에는 

 

가연성이 높다는 문제가 있었다.

 

때문에 셀룰로이드 의치를 낀 사람이 담배를 피우다가 의치에 불이 붙어 혼이 난 사례가 있다고 한다.

 

물론 오늘날에는 그런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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