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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스토리) 안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이유는?

by 하프투테이크 2023.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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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종교들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세계 3대 종교는 불교, 이슬람교, 크리스트교이다.

 

이들의 발상지는 현재도 순례자가 끝없이 밀려들고 세계적으로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 중에서 유독 불교만은 발상지에서 거의 근절된 상태이다.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는 불교도가 거의 없다?

 

이슬람교의 발상지인 메카가 위치한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슬람교도 인구는 거의 100%이며,

 

크리스트교의 발상지인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일대에 아직도 다수의 크리스트교도가 존재하는 것과 비교하면

 

인도의 불교도 수는 매우 적다.

 

2001년의 조사에서 인도의 불교도 수는 전체 인구의 0.1%에 불과했다.

 

전 세계 인구 중에서 7%의 신도를 가진 불교가 왜 다른 곳도 아닌 그 발상지에서 이렇게 영향력이 약화된 것일까?

 

민중과 너무나 멀어진 불교

 

석가모니가 처음 창시할 당시의 불교는 고통 받는 민중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인도의 종교적 주도권을 쥐고 있던 브라만교는 그 자체가 특권 계층화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할 뿐,

 

카스트 밑바닥에 자리한 민중의 고통에는 눈길을 돌리지 않고 있었다.

 

백성들에게는 농사를 짓기 위한 가축도 넉넉하지 않은데, 

브라만들은 여전히 유목사회의 습관대로(인도에 브라만교를 들여온 아리아인들은 원래 중앙아시아 계통의

 

유목 민족이었다) 대량의 소를 죽여서 제물로 바치는 희생제를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소 떼는 당연히 백성들에게 조세로 거둔 것이었다.

 

초기 불교는 카스트제도의 억압과 무거운 세금으로 고생하고 있던 백성들에게 내세에서의 구원과 

 

현세에서의 평등을 설파하며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하지만 불교의 성장을 이용하려던 여러 군주들이 불교를 후원하기 시작하면서, 

 

불교는 민중의 종교가 아닌 집권세력의 종교가 된다.

 

수백 년에 걸쳐 왕실과 귀족들의 후원을 받고 권력과 결탁한 불교 교단은 초심을 잃고 민중보다는 권력집단을 

 

옹호하는 편에 서게 되었다.

지배층의 편에 선 불교는 지방어를 사용하는 민중들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산스크리트어만 써서 

 

복잡한 형이상학적인 이론을 논하는 알아들을 수 없는 종교일 뿐이었다.

 

힌두교의 반격에 무너지다

 

불교가 지배집단의 후원을 받으며 안주하는 사이, 불교에 밀려날 뻔 했던 브라만교가 '힌두교' 라는 이름으로 되살아난다.

 

브라만교의 재기는 불교의 여러 이념들을 받아들여 벤치마킹한 데서 나타났는데,

 

대표적으로 들여온 것이 불교의 불살생(不殺生) 계율이다.

과거 대량의 소를 죽여 희생제를 바치던 모습 대신 암소를 숭배하여 절대 소를 죽이지 않는 형태의 신앙이 출현했고,

 

한 발 더 나가서 석가모니가 힌두교의 신 비쉬누의 환생이라고 주장하여 불교 자체를 힌두교 내에 편입시키는

 

일종의 '종교공정' 까지 시행했다.

 

문제는 불교가 힌두교의 이런 움직임에 재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귀족화되면서 속세와 멀어진 불교 교단은 민중들에게 다시 접근하지도 못했고,

 

심지어 힌두교 측의 불교 고리 흡수에 대한 방어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불교는 대중에게 인기 있는 힌두교의 신들을 불교 신화 속에 영입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고,

 

부처의 화신(化身) 문제와 같이 힌두교가 불교의 교리를 흡수하려는 움직임에도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대중에게 있어서 이런 모습은 불교가 힌두교와의 유사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였다.

 

여기에다 힌두교와 흡사한 탄트라 불교까지 등장하자 둘 사이는 거의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브라만교의 동일한 공격을 받은 자이나교가 같은 수단으로 반격한 것과 대비된다.

 

자이나교는 힌두교 측이 자신들의 창시자를 역시 부처처럼 비쉬누의 화신이라고 주장하자 비쉬누가 저지른

 

온갖 비도덕적인 행위들을 들어 이를 부인하고 비난했으며, 기존의 브라만교 버전의 영웅서사시를 

 

자이나교의 입장에서 완전히 재해석한 버전으로 만들어 배포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그 결과 자이나교 교단은 규모 자체는 작을지언정 현재도 인도에서 그 기반을 굳건히 하고 있다.

 

이슬람의 습격으로 만신창이가 되다

 

민중들로부터의 외면과 왕실 후원의 상실, 힌두교의 반격 등이 겹쳐 점점 입지가 좁아져 가던 인도에서의 불교 존속에

 

결정타를 먹인 것은 바로 이슬람의 내습이었다.

 

7세기 아라비아의 사막에서 출현한 이슬람교는 점점 그 세력을 넓히며 동진해 왔는데, 

 

아프가니스탄이 8세기 초 이슬람화되면서 인도와 마주하게 되었다.

특히 10세기 말 아프간을 지배하던 튀르크 혈통의 가즈니 왕조와 구르 왕조는 986년부터 시작된 일련의 약탈원정에서

 

인도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는데, 이 과정에서 불교문화의 총본산이었던 몇몇 사원들이 파괴되고 재산은 약탈당했으며

 

승려들은 살해당하거나 노예가 되었다.

이미 쇠락해 가던 인도 내의 불교는 이로써 치명타를 받고, 생존한 승려들은 네팔이나 티베트 등으로 도피했으며

 

인도 내에서는 불교가 사라지게 되었다.

 

오늘날 인도에 존재하는 불교도의 대부분은 20세기 중반에 시작된 신분해방 운동의 일환으로 

 

카스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힌두교에서 개종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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