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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스토리) 테르모필라이(테르모필레) 에서 죽은 사람은 정말 300명 뿐일까?

by 하프투테이크 2023.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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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영화<300>으로 잘 알려진 '테르모필라이 전투' 는 

 

그리스를 침략한 페르시아 제국의 대군을 맞아 그리스 연합군이 벌인 전투로, 

 

레오니다스 왕의 지휘를 받은 300명의 스파트라 전사들이 고립무원 상태에서 압도적인 수의 페르시아군과

 

싸우다가 전멸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과연 300명만이 이 전투에서 죽은 전부일까?

 

세계 제국 페르시아와 끝까지 싸운 용맹한 스파르타

 

'최초의 세계 제국' 이라고 할 수 있는 페르시아는 당시 알려진 문명 세계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다.

 

반란을 진압하고 내부를 안정시킨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는 이오니아의 반한을 지원한 그리스를 침공하려다가

 

마라톤 전투의 패배로 실패했고, 그 아들인 크세르크세스 왕은 육지를 통해 대군을 진격시킴으로써 이를 이루고자 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필두로 한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7,000명에 달하는 연합군을 편성하여 

 

테살리아에서 그리스 본토의 보이오티아 지방으로 들어가는 테르모필라이 고갯길에서 페르시아군을 저지하고 있었다.

이 길은 매우 좁고 험해서 소수의 병력이 충분히 대군을 막아낼 수 있는 장소였다.

 

실제로 페르시아군이 3일간 맹공격을 퍼부었음에도 그리스군의 방어선은 뚫리지 않았다.

 

그런데 현지 주민 중에서 배신자가 나타났다.

 

에피알테스라는 자가 페르시아의 돈을 받고 그리스군이 지키고 있는 지점을 우회할 수 있는 샛길을 가르쳐 준 것이다.

1만의 페르시아 별동대가 새벽을 틈타 당장 그 샛길로 달려갔고, 혹시나 해서 그 길목을 지키고 있던

 

1,000명의 그리스군은 페르시아군의 기습을 받고 단박에 작살이 나고 말았다.

 

다행히 페르시아군이 도착하기 전에 적군이 배후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 먼저 그리스군 진영에 도착했다.

 

하지만 이는 후방에서 전해진 것이 아니라 페르시아군 소속의 그리스인 병사가 위장투항하면서 의도적으로 넘긴 정보로,

 

페르시아 측의 의도는 그리스군이 진지를 벗어나 철수 중일 때 기습하여 보다 쉽게 치고자 함이었다.

만약 그리스군이 페르시아군의 우회 사실을 알고 허겁지겁 철수했다면,

 

페르시아 본대와 별동대 사이에 끼어 완벽하게 섬멸당했을 것이다.

 

그런 페르시아의 의도를 깨뜨린 것이 바로 레오니다스와 그의 부하 병사들이었다.

 

적군의 우회를 알고 공포에 휩싸인 다른 그리스인들은 당장 전군을 철수시켜 다음 전투에 대비하자고 했는데,

 

스파르타군 대표이자 총사령관이었던 레오니다스는 전군 철수에는 동의했으나 정작 그 자신은 철수를 거부했다.

스파르타인에게 후퇴란 있을 수 없다는 명예와 더불어 본대가 후퇴할 동안

 

후위부대를 남겨야 한다는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이제 수십만의 페르시아군 앞에 한줌 밖에 안 되는 그리스군이 남게 되었다.

 

 

사실은 300명이 아니라 1,700명이었다!

 

테르모필라이에서 페르시아군을 저지하기 위해 남은 스파르타군은 분명 300명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페르시아인들과 최후의 결전을 벌인 것은 스파르타군 전사들만이 아니었다.

 

먼저 스파르타인들이 거느리고 온 300명의 노예가 있었다.

 

노예제 사회였던 당시에는 자유민 전사가 전쟁에 나갈 때면 노예를 데려가서 무기와 식량을 운반하게 했는데,

 

테르모필라이에 나간 스파르타인들은 각각 한 명씩의 노예를 데리고 갔다.

이들 노예들도 주인들과 함께 싸우다가 모두 죽었지만 많은 역사책들은 

 

이들 스파르타 노예들의 죽음에 대하여 단 한 글자도 적지 않았다.

 

노예들뿐만이 아니다.

 

테르모필라이에서 죽은 자유민 전사들 중에는 스파르타 말고 다른 도시국가 출신 병사들도 있었다.

무려 1,100명이나 되는 전사들이 스파르타인들과 함께 싸우다가 모두 죽었지만,

 

이들의 죽음은 스파르타의 300명에게 가려 보이지 않았다.

 

과연 이 1,100명은 어디서 왔을까? 그리고 왜 스파르타인들과 함께 죽었을까?

 

이들 중 700명은 보이오티아 지방의 도시국가인 테스피아이에서 온 병사들이었다.

스파르타군의 전멸을 각오한 레오니다스는 다음 전투에 단 한 명이라도 더 투입하기 위해 

 

이들에게도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테스피아이 병사들은 일언지하에 총사령관의 명령을 거절했다.

 

그리스에서도 고집 세기로 소문난 테스피아이 남자들이 일치단결해서 철수를 거부하자 

 

레오니다스로서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400명도 테스피아이와 같은 보이오티아 지방의 테베에서 온 병사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남은 이유는 또 달랐다.

 

이들 전사들의 고향 테베에서는 이번 전쟁에서 어느 쪽에 붙어야 할 것인가를 놓고 아직도 

 

소수의 친그리스파와 친페르시아파가 싸우는 중이었고, 이들 400명은 죽으러 갈 것을 알면서도 참전한 

 

친그리스파 시민들이었다.

고향에 돌아간다고 해 봐야 시의 주도권은 페르시아파가 차지했을 것이고, 저들은 연합군에 참전한 시민들을

 

곧 밀려올 페르시아의 대군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희생양으로 내세울 것이 분명했다.

 

이들 400명은 고향에서 숙청되느니 차라리 전장에서 죽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완전히 포위당한 상태에서 그리스군이 벌인 최후의 분전은 전투를 관전하던 크세르크세스가 세 번이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게 할 정도로 치열했다.

하지만 압도적인 수적 열세는 어쩔 수 없었고, 결국 스파르타인과 테스피아이인들은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모두 전사 했으며 일부 테베인들만이 분투 끝에 포로가 되었다.

 

크세르크세스는 전사한 레오니다스의 목을 잘라 아테네 방향을 향해 말뚝에 걸고, 

 

포로로 잡은 테베인들은 쇠사슬로 묶어 낙인을 찍었다.

후에 페르시아 전쟁은 결국 그리스의 승리로 끝났으며 테르모필라이 전투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낸 전투로 칭송을 받았다.

 

또한 테르모필라이의 옛 전장에는 "오 나그네여, 라케다이몬(스파르타의 정식 이름)에 가서 전해주오. 

 

그들의 명을 받아 우리가 지금 여기에 누워 있노라고." 하는 문구가 새겨진 비석이 지금도 놓여 있어서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와 그 부하 300명의 분전을 전하고 있다.

하지만 주인과 함께 죽어간 300명의 노예들과 테스피아이, 테베의 병사들은 누구도 기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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