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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스토리) 프랑스 혁명에 대한 잘못된 상식들

by 하프투테이크 2023.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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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일어난 프랑스혁명은 절대왕정을 종식시키고 인간의 존엄을 강조했다는 데에 

 

현대 민주주의를 수립한 결정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 혁명을 이뤄내는 과정에서 수많은 피를 흘렸다는 사실은 인류 역사 중 비극의 한 장면이기도 하다.

이 프랑스혁명에서 벌어진 첫 번째 유혈사태가 바로 바스티유 요새의 함락이다.

 

바스티유 요새가 함락된 날인 7월 14일은 현재도 프랑스에서 혁명기념일로 최대의 국경일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잘못 알려진 몇 가지 상식이 있다.

 

정치범 해방을 위해 바스티유 요새를 공격했다?

 

바스티유 요새는 본래 파리를 방어하기 위한 군사 요새지만, 이 시기에는 감옥으로 사용되고 있는 압제의 상징이었다.

 

이 요새는 정권에 반항하는 많은 정치범을 수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유를 원하는 시민들이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요새를 공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며, 파리 시민들이 이곳을 공격한 이유는 바로 무기 때문이었다.

혁명이 일어났을 당시, 시위가 반발하는 불온한 수도의 분위기에 불안감을 느낀 국왕 루이 16세는 

 

국경 지대에 배치되어 있던 군대를 파리 주변에 대규모로 소환해 놓고 있었다.

 

게다가 이 군대의 병력은 죄다 독일인과 스위스인 등 외국인 용병으로 프랑스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슴없이 시민에게 발포하는가 하면 칼을 빼든 기병들이 비무장한 시위대를 난자하고 짓밟는 사태가 잇달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시민들은 필사적으로 자위를 위한 무기를 구했다.

 

먼저 습격의 대상이 된 것은 앵발리드였다.

 

앵발리드는 전장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을 위한 병원이었던 곳으로 유사시를 위한 3만여 정의 소총이 저장되어 있었고,

 

경비하는 인원도 얼마 없었기에 7월 14일 아침에 이곳을 공격한 시민들은 쉽게 대량의 총기를 얻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총만 있을 뿐 탄약이 없었고, 시민들은 탄약을 얻기 위해 바스티유로 몰려갔다.

 

정치범 해방 따위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바스티유 요새가 일종의 감옥으로써, 루이 13세 이래도 사상범과 같은 고급 범죄자를 수감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 감옥을 거친 유명인사로 볼테르가 있다.

그러나 1750년대 이후로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된 범죄자는 대부분 사기꾼이나 위폐 제조 등의 잡범이었으며,

 

바스티유가 함락되던 그날 수감되어 있던 일곱 명의 죄수들 중에도 정치범은 하나도 없었다.

 

네 명은 화폐 위조범, 두 명은 정신병자, 한 명은 정신 좀 차리라고 가족들이 집어넣은 망나니 귀족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요새가 함락되기 며칠 전까지는 변태성욕자로 유명한 사드 후작도 수감되어 있었다.

 

이 시기 바스티유는 정치범 따위와는 아무 상관도 없었던 것이다.

 

바스티유 수비대는 전멸했을까?

 

국내에 출간된 일부 아동서적은 바스티유가 시민들에게 함락당했을 때 항복한 수비병 전원이 분노한 시민들에게

 

학살당한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많이 다르다.

 

일단 교전 중 발생한 양측의 인명 피해를 보면 시민들의 피해가 압도적이다.

120명도 안 되는 수비대에 대해 천여 명의 시민이 공격을 가했는데, 바스티유 수비대는 수비병 한 명이 죽은 데에 비해

 

시민들은 98먕이 죽고 7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그럼에도 시민들이 린치를 가해 죽인 것은 수비사령관 드 로네이 후작과 장교 세 명뿐이었고,

 

나머지 병사들은 대부분이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다.

 

심지어 30여 명의 스위스인 용병들조차 시민들과 그들 편에 붙은 프랑스인 병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본대로 복귀할 수 있었다.

 

루이 16세를 지키던 스위스인 용병들은 전멸했을까?

 

프랑스혁명이 아직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전, 국왕 루이 16세는 아직 군주의 지위를 유지한 채

 

튈르리 궁전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혁명이 진행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은 대규모의 군중에 1792년 8월 10일에 

 

궁전을 습격했고, 국왕은 황급히 국민의회로 피신했다.

 

국왕의 호위병으로 튈르리 궁전을 지키고 있던 스위스 용병대는 전멸하고 말았다는 것이 국내에 알려진 상식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사실과 다르다.

 

이날 튈르리 궁에 배치되어 있던 스위스 용병의 숫자는 950명으로, 여기서 600명가량은 군중과의 전투 중 전사하거나,

 

그들이 시민들에게 발포한 것에 대해 분노한 시민들에게 항복한 후 그 자리에서 살해당했다.

 

튈르리 궁전 수비에 가담한 병력으로 스위스 근위병들 이외에 왕당파 귀족 200여 명 정도가 더 있었지만,

 

이들은 대부분 민간복을 입고 있었으므로 군복을 입은 스위스 용벙들과 달리 군중속에 섞여서 도피할 수 있었다.

살아남은 나머지 용병들 중 60명 정도는 포로가 되어 파리 시청으로 호송된 후 도착지에서 학살당했고,

 

나머지는 감옥에서 부상이 악화되어 죽거나 '9월 학살(반프랑스 연합군이 접근해오자 파리 시민들이 흥분한 나머지

 

파리 시내의 감옥을 습격하여 적에게 내응할지 모르는 반혁명분자들을 대규모로 학살한 사건.

 

여자와 아이를 포함한 1,200여 명의 죄수가 사망.) 에서 대부분 죽었다.

그래도 용케 피한 사람은 있었고, 최종적으로 100명 정도의 스위스 근위병이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들은 '전멸'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상 많은 인원이 죽었기 때문에 거의 전멸한 거나 다를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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