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스토리

(스토리) 조총은 정말 강력한 신무기였을까?#2

by 하프투테이크 2023. 2. 9.
728x90
반응형
SMALL

조총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다

 

그럼 대포보다 작고, 조선군의 활보다 유효사거리도 짧으며 발사속도도 늦었던 조총이 

 

어떻게 전장에서 맹활약을 펼칠 수 있었을까?

 

일단 조총은 잘 맞지는 않으나 표적에 맞기만 하면 확실한 위력을 발휘했다.

 

조선군 장수들이 아무리 갑옷을 갖춰 입어도 조총에 맞았을 경우 방어를 보장할 수 없었으며,

 

이순신을 비롯한 수많은 조선의 육해군 장수들이 조총에 맞아 죽었다.

게다가 승자총통처럼 비슷한 형태의 조선 개인 화기들이 명중률이 낮아 한 번에 여러 개의 탄환을 넣고

 

산탄총처럼 운용하거나 화살 형태의 발사체를 사용해야 했던 데 비교하면 조총의 명중률은 휠씬 정확한 편이었다.

 

게다가 조총이 활에 비해 가진 확실한 우위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대량생산과 대량투입이 

 

활에 비해 훨씬 용이하다는 점이었다.

조선군이 사용하는 합성궁은 숙련된 장인에 의해 만들어지며, 물소 뿔 등 여러 가지 재료를 조합하여

 

긴 시간을 들여 제작하기 때문에 매우 비싼 무기였다.

 

게다가 물소는 한반도에 살지 않기 때문에 활 제조에 필요한 물소뿔은 모두 수입해 와야 했으며,

 

그 수입선이었던 중국과 일본은 무기의 재료가 되는 전략물자인 물소뿔을 잘 팔지 않으려고 했다.

또한 조선 궁수의 위력이 아무리 막강하다고 해도 활에 익숙해지는 시간이 문제였다.

 

어려서부터 수련을 시작하여 10년 정도는 활을 다뤄봐야 쓸 만한 궁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은 활 종류의 무기가 갖는 공통적인 특성으로, 전근대사회에서 활을 주력 무기로 사용하여 용맹을 떨친 국가들은

 

대부분 활을 사용하는 수렵이 일상화된 유목민족들이 건립한 국가였다.

물론 조선이나 영국처럼 유목국가가 아니면서도 강력한 궁병 전력을 가진 사례가 있으나

 

이를 위해서는 엄청난 수련이 필요했다.

 

조선에서는 활쏘기가 사대부의 교양이자 국방을 위한 기본 수단으로 간주되어 국가적으로 권장되었고,

 

중세 영국에서는 한술 더 떠서 평민들에게 활쏘기 이외에 모든 스포츠를 금지하고

 

틈만 나면 활을 쏘도록 왕명으로 강제할 정도였다.

백년전쟁에서 프랑스의 기사군을 상대로 위력을 발휘한 영국의 장궁대는 이렇게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에 반해서 조총은 제작이나 사용 모두 활에 비해서 훨씬 쉬웠다.

 

조총 제작에는 특별한 기술이나 재료가 필요하지 않아서, 숙련된 대장장이 한 사람만 있으면

 

동네 대장간에서도 얼마든지 총을 만들 수 있었다.

게다가 활 만드는 장인은 활 만드는 것 외에는 전혀 쓸모가 없는데 반해서,

 

총 만드는 대장장이는 총 만들 일이 없으면 다른 물건을 만드는 데 투입할 수 있어서 평시에도 효용이 높았다.

 

사수의 양성에 있어서도 조총이 더 유리했다.

 

쓸 만한 궁수를 키워내려면 적어도 수년이 걸리는 데 비해서 조총은 한두 달 정도만 훈련하면 

 

전투에 투입할 수 있을 정도의 병사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저격수를 양성하는 게 아닌 이상, 총구를 적 쪽으로 돌리고 명령에 따라 방아쇠를 당길 수만 있다면

 

더 이상의 훈련은 필요하지 않았다.

 

게다가 조총수에게는 활시위를 당기는 데 필요한 팔의 근력도 요구되지 않았다.

 

이런 특성 때문에 총은 '아무 훈련을 받지 않은 여자나 어린애도 수련을 쌓은 무사를 죽일 수 있는 무기' 가 되었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귀족 전사들은 총을 혐오했던 것이다.

활을 중시하던 조선 역시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조총의 장점을 확실히 깨달았다.

 

때문에 임진왜란 이후 조선 군대는 조총을 핵심 무장으로 채택하여 사실상 

 

전 병력을 조총병으로 편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조총은 활보다 강력하진 않았지만, 보다 편리했기 때문에 최후의 승자가 되었던 것이다.

반응형
SMALL

 

728x90
반응형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