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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스토리) 바이킹이 발견한 빈란드는 어떤 곳이었을까?

by 하프투테이크 2023.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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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덩어리가 떠다니는 멀고 먼 바다를 건너 전인미답의 새 땅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그들이 찾아 헤매던 모든 것이 있었다.

 

높이 솟은 나무들이 들어찬 숲, 부드러운 풀밭, 그리고 그 누구도 그들을 억압하지 않는 자유까지,

 

키 낮은 숲에서 야생 포도송이를 발견한 항해자들은 이 새로운 땅에 이름을 붙였다.

 

포도의 땅. '빈란드(Vinland)' 라고.

 

새 땅을 찾아서 떠난 바이킹

 

기원후 986년경 대서양을 건너 동쪽에서 온 이들 탐험가들은 노르웨이 출신의 바이킹이었다.

 

바이킹이라고 하면 많은 이들은 뿔 달린 투구를 쓰고 도끼를 휘두르는 해적을 생각하지만,

 

실제 바이킹은 단순한 해적 집단이 아니었다.

 

바이킹 중에는 상인도 있고 농민도 있었으며, 새로운 땅을 찾아 모험을 떠나는 탐험가들도 존재했다.

이들의 모험심에 찬 활동으로 인해서 페로제도, 아이슬란드, 그린란드가 발견되었고 러시아, 영국, 노르망디에

 

국가가 탄생했다.

 

이들이 원래 살던 곳을 떠나 서쪽으로 간 것은 고향에서의 정세변화에 기인한 탓이 크다.

 

우리는 단순히 바이킹이라고 묶어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지만, 일명 '노르드인(북방인)' 은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등

 

북유럽 출신자의 총칭이었다.

이 중에서 서쪽으로 향한 것은 대부분 노르웨이계 바이킹인데, 이들이 고향을 떠난 첫째 이유는 기후 변화 때문이었다.

 

8세기 이후 나타난 소빙하기는 이들이 살던 북유럽의 기후를 저하시켜 농사를 망쳤고,

 

이로 인한 식량 부족은 생존의 위기를 초래했다.

 

이에 많은 바이킹들이 고향을 떠나 남쪽으로 이주 또는 원정을 떠났고, 일부는 서쪽으로 떠났던 것이다.

다수의 바이킹은 가까운 노르망디, 영국, 아일랜드 등으로 이주했지만 일부는 멀리 있는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등으로

 

떠나기도 했다.

 

본국인 노르웨이의 정치적 변화는 이런 움직임을 한층 더 부채질했다.

 

본래 소국이 난립하고 있던 노르웨이가 '머리카락이 아름다운 왕' 하랄 1세에 의해 통일되면서

 

그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한 수많은 세력이 노르웨이를 떠나야만 했다.

 

실망만 안겨 준 신천지의 발견

 

추운 기후의 스칸디나비아를 떠나 새 땅을 찾아 떠난 이들은 대부분 남쪽의 영국, 프랑스 등지를 향했다.

 

이 지역은 이미 오랜 세월 인간이 살아오면서 충분히 개발되어 있었고,

 

부와 풍요가 있어 농업과 상업이 충분히 발달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미 주인이 있는 땅에 들어간다는 것은 전쟁을 뜻했고, 

 

이는 3세기에 걸쳐 바이킹의 악명이 전 유럽에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험하고 거친 땅에 살던 바이킹들은 해적으로서, 용병으로서, 모험가로서 전 유럽을 누비고 다녔다.

 

그러나 바이킹들 중에는 비어 있는 땅에 평화롭게 정주하기를 바라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이미 사람이 들어찬 유럽 대신 새로운 땅을 찾아 서쪽으로 갔고, 

 

그 과정에서 우연히 '아이슬란드' 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곳에는 왕도 없었고 전쟁도 없었으므로 780년경부터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문제는 '아이스(ice)랜드' 라고 불릴 정도의 추위와 척박한 환경이었다.

 

아이슬란드의 얼마 안 되는 숲과 초원은 바이킹들이 정착하자 곧 파괴되기 시작했고,

 

이 섬의 부족한 천연자원으로는 늘어나는 인구를 부양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새로운 땅 '그린란드' 가 발견되었다.

많은 바이킹들이 새로운 땅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아이슬란드를 떠났지만, 

 

그린란드에 도착한 이주자들은 얼마 안 가서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린란드는 어느정도 '그린(green)'을 띠는 것은 짧은 여름 뿐, 겨울에는 아이슬란드 보다 더한 추위가 몰아치는

 

얼음의 땅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곳에는 아이슬란드만큼의 숲이나 초원도 없었다.

 

빈란드를 발견하지만 결국 정착에 실패하다

 

그린란드의 부족한 천연자원은 보다 서쪽에 있을지 모르는 새로운 땅을 찾으러 나서기에 충분한 유인조건이었다.

 

그린란드에 도착하자마자 바이킹들은 부지런히 주변을 탐색하며 새로운 땅을 찾았다.

 

마침 그린란드는 북아메리카 대륙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육지를 따라가는 항해에 능숙했던 바이킹들에게 북아메리카로의 항해는 쉬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오늘날의 뉴펀들랜드에서 거대한 숲과 초원이 가득한 신천지 '빈란드' 를 찾아내고 말았던 것이다.

문제는 그곳에 이미 원주민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곳에는 이미 북아메리카 원주민(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고,

 

바이킹들은 이들을 '비열한 사람' 이라는 뜻의 "스크라엘링" 이라고 불렀다.

 

유감스럽게도 바이킹들은 이들과 대립관계로 들어가고 말았는데, 이는 바이킹의 폭력에서 비롯되었다.

 

빈란드에 도착한 바이킹들이 아홉 명의 인디언을 처음 만났을 때 여덟 명을 그 자리에서 죽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이다.

도망친 한 사람이 동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곧 인디언들이 무더기로 몰려와 싸움이 벌어지고 말았다.

 

바이킹은 철기를 가지고 잇었고 개별적인 싸움에서는 그 유리함을 살릴 수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수가 너무나 적었다.

 

바이킹들의 폭이 좁은 배는 대량의 주민들을 데려오기엔 부족했으며, 배 자체도 충분하지 않았다.

 

결국 바이킹들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후 상당 기간은 우호관계가 회복되었다.

하지만 짐승의 젖을 먹는 전통이 없어 젖당 분해 효소가 없었던 인디언들은 바이킹들이 선물한 우유를 마시고

 

복통을 일으킨 후 저들이 자신들에게 독을 먹였다고 오해를 한다거나, 바이킹들의 무기를 훔치려고 시도한 인디언을

 

바이킹이 살해한다거나 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또 싸움이 벌어지고 말았다.

 

결국 바이킹들은 빈란드에 정착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린란드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그린란드에서 필요한 철과 목재를 얻기 위해 가끔 북아메리카를 찾아갔다.

기원후 1000년경 빈란드를 포기한 바이킹들은 이후에도 450여 년을 더 그린란드에서의 삶을 이어나갔다.

 

그린란드의 바이킹들은 소규모의 목축과 사냥으로 생계를 이었으며, 

 

여기서 얻은 양모나 해마, 엄니 등의 산물을 유럽에 팔아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며 근근이 살아갔다.

 

그러나 척박한 환경에서 유럽에서의 지원도 거의 끊기고, 충분한 자원도 갖추지 못한 그린란드의 바이킹 식민지는

 

기후가 악화되자 곧바로 위기에 몰리고 말았다.

14세기 말, 기후가 변하면서 그린란드에 혹독한 추위가 닥치자 보다 북쪽에 있던 서쪽 정착지가 먼저 사라졌다.

 

이후 70년가량 더 버티던 동쪽 정착지마저 15세기 전반기에 스러지면서

 

신대륙의 바이킹 식민지는 완전히 소멸하고 말았다.

 

그들의 소식이 완전히 유럽에 알려진 것은 1723년, 

 

아메리카 대륙에 콜럼버스보다 먼저 도착했다는 사실이 후대에 입증된 것은 1961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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