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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스토리) 트로이를 향한 하인리히 슐리만의 집착

by 하프투테이크 2023.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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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으로 번성했으나 10년에 걸친 전쟁 끝에 지칠 대로 지친 해변도시. 그러나 드디어 그 고생도 끝날 날이 왔다.

 

바다 건너에서 온 사악한 침략자들이 마침내 물러간 것이다.

 

도시의 왕과 시민들은 환호하며 기뻐하고 적을 물리쳐 주신 신의 은총에 감사한다.

 

그리고 적군이 남겨놓고 간 거대한 목마를 전리품으로 도시에 들여놓는데······.

 

트로이의 전설에 매혹된 소년, 하인리히 슐리만

 

위의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가 남긴 서사시의 내용이다.

 

호메로스는 기원전 13세기경에 있었던 트로이전쟁을 소재로 해서 <일리아드> 와 <오디세이> 라는 

 

두 편의 서사시를 남겼는데, 고대 이후로 이 시들은 호메로스의 상상으로 만들어낸 이야기로 취급되는 경향이 강했다.

 

소년 하인리히 슐리만에게 일리아드를 선물한 아버지 역시 옛 이야기로만 트로이전쟁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슐리만은 트로이전쟁이 실존했던 전쟁이 아니라면 그렇게 자세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어른이 된 후에 꼭 트로이를 발국하고야 말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하지만 슐리만의 집은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트로이를 찾기 위한 교육을 받는 대신

 

어려서부터 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해야 했다.

성공하여 꽤 큰 규모의 사업가가 된 슐리만은 돈을 벌기 위해 일하면서도 어학 공부에 힘썼는데,

 

이는 자신의 사업에 도움이 됨은 물론 트로이에 대해 더 많은 공부를 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모국어인 독일어는 물론 영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 스웨덴어, 폴란드어,

 

라트비아어, 현대 그리스어, 고대 그리스어, 러시아어, 아랍어, 라틴어, 라트비아어, 체코어, 터키어까지 

 

수많은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늘 머무르는 나라의 언어로 일기를 썼다.

 

충분한 재산을 모은 슐리만은 아직 젊은 36세의 나이에 잘나가던 사업을 청산하고 본격적인 고고학 연구를 시작한다.

 

특히 어려서부터의 꿈이었던 트로이야말로 그에게 있어서 최상의 꿈이었다.

 

그 과정에서 발굴에 관심이 없었던 라시아 출신의 첫 아내와 이혼한 후 47세의 나이로 30세나 어린 

 

그리스 소녀와 다시 결혼했다.

그녀는 40년간 그가 꿈꿔 왔던 것처럼 '트로이의 헬렌' 에 버금갈 만한 미모를 갖추고 있었고,

 

<일리아드>를 고대 그리스어로 읽을 만큼의 교양을 갖추고 있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호메로스를 좋아하는 아내의 조력으로 슐리만은 본격적인 발굴에 나서게 된다.

 

슐리만, 트로이를 발견하다!

 

초기에 슐리만이 생각했던 트로이의 위치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트로이의 후보지라고 생각하던 부나르바시라는 곳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히사를리크 언덕을 트로이라고 주장하던 영국의 고고학자 프랭크 캘버트가 

 

그에게 접근하여 발굴을 후원해 줄 것을 요청하자 현지를 답사한 후 캘버트의 견해에 따라 발굴을 시도하게 되었다.

 

슐리만 스스로 히사를리크 언덕을 찾아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지만 사실 이는 슐리만 자신이 남긴 거짓말이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점은 트로이 자체의 존재를 의심한 사람은, 적어도 학자들 중에는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트로이 자체의 존재는 믿었으나 그 위치에 대해서 슐리만과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발굴로 직접 확인하려 하지도 않았다.

 

여기에서 자신의 꿈을 직접 실현하고자 했던 슐리만과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하여간 이어진 발굴의 결과 슐리만은 히사를리크 언덕 아래에서 트로이의 유적을 발견해 내고 말았다.

7층에 달하는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 도시의 흔적이 겹겹이 쌓여 있었고,

 

그 밑에는 아직 금속을 사용하지 않던 도시의 유적이 두 개나 더 있었다.

 

과연 이 중에 어느 것이 호메로스의 트로이일까?

 

슐리만의 확신을 세워 준 것은 1873년 5월 27일 발굴이었다.

슐리만은 밑에서 두 번째 층의 도시가 화재로 파괴된 흔적을 발견하고 

 

이것이 호메로스의 트로이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현장 구석을 둘러보다가 커다란 구리 상자를 찾았던 것이다.

 

그 안에는 금, 은, 구리로 만들어진 막대한 양의 보물이 들어 있었다.

슐리만은 드디어 트로이를 찾았다고 생각하고, 트로이 전쟁 당시 왕의 이름을 따 '프리아모스의 보물' 이라고 

 

자신이 발견한 보물을 명명했다.

 

트로이 이후에도 슐리만은 미케네 등 여러 유적을 발굴하여 명성을 날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트로이의 발굴을 통해 그는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슐리만의 트로이 발견은 틀렸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서 슐리만의 발견은 그 가치가 많이 떨어졌다.

 

먼저, 슐리만이 그토록 애써 찾아낸 도시는 그가 찾고자 원했던 호메로스의 트로이가 아니었다.

 

발굴된 도시에 대한 연구가 계속된 결과, 그가 찾아낸 트로이는 초기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적어도 기원전 2500년경의 도시였다.

이는 호메로스의 트로이보다 1,300~1,400년이나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현재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호메로스의 진짜 트로이는 밑에서부터 여섯 번째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슐리만은 너무 깊이 파고들어갔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슐리만은 자신이 찾고자 했던 '진짜' 트로이는 물론 많은 시대의 유적을 말 그대로 파괴해버리고 말았다.

아직 기술이 부족했던 시대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슐리만의 발굴은 마구잡이 보물찾기의 걍행이 강했으며,

 

번쩍이는 황금 유물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 다른 것들의 보존에는 소홀한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발굴한 유물의 처분에 있어서도 슐리만의 행동은 고고학자리가보다 도굴꾼에 가까웠다.

 

애초에 발굴품의 절반은 오스만 정부의 소유로 한다는 약속을 했음에도,

 

슐리만은 그가 발견한 황금 유물 전부를 독일로 빼돌렸다.

나중에야 약속 위반을 알게 된 오스만 정부가 후속 발굴을 금지하자 그제야 도기 및 약간의 구리 유물을 제공하고

 

반출한 유물에 대한 벌금을 납부했을 뿐이었다.

 

이런 행각은 미케네 발굴에서도 반복되어 그리스 정부는 직접 감독관을 파견하여 발굴 현장을 감시하게 할 정도였으며,

 

오스만 당국도 크레타에서의 발굴을 허가하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의 성과를 세상에 알리는 책에서도 캘버트의 업적을 삭제하고 유물의 발견 위치를 변동,

 

발견 경위에 대해서도 사실과 다르게 기록하는 등 여러 가지 거짓말을 남겨 자신의 업적을 과장하고 모든 것을

 

극적으로 보이게 만들려고 시도했다.

 

이런 행동들을 볼 때 확실히 슐리만은 학문적 진실에 충실한 훌륭한 학자는 아니었다.

그는 학자라기보다는 애호가였으며, 광범위한 진실보다는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아마추어였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트로이 발굴이 가능했다는 것 또한 역설이다.

 

만약 슐리만이 하나의 유적을 철저하게 파낸 다음에야 그 아래층을 살피는 식으로 조심스러운 발굴을 했다면,

 

프리아모스의 보물과 4,500년 전의 도시는 아직도 히사를리크 언덕 밑에서 잠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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