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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스토리) 갑골문자는 어떻게 발견되었을까?

by 하프투테이크 2023.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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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만물 중 가장 위대하고 신령한 생물은 '용(龍)' 이다.

 

낙타의 얼굴과 사슴의 뿔, 귀신의 눈과 소의 귀, 사자의 갈기와 뱀의 몸통, 매의 발과 물고기의 비늘을 가진 용은

 

자유롭게 하늘을 날며 갖가지 형태와 크기로 몸을 바꾸는 등 오묘한 신통력을 부린다.

 

또한 용은 강과 바다에 주재하는 물의 신으로서 날씨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기분에 따라 가뭄을 일으키거나 비를 내려 가뭄으로부터 세상을 구제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입에서 기를 뿜어 불을 일으킬 수도 있다.

 

약으로 쓰는 용의 뼈

 

이렇게 위대한 동물이니만큼 용의 몸을 구성하는 모든 부위는 막강한 힘을 갖는다.

 

용은 1,000년마다 새로운 육체로 옮겨가는 몸바꿈을 하는데, 

 

이때 지상에 버리게 되는 용뇌(龍腦)와 용골(龍骨)은 만병통치의 영약으로 간주되었다.

 

특히 뇌는 병뿐만 아니라 악귀와 재앙으로부터도 수호해 주는 영험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동해의 방장산(方丈山) 기슭에는 용의 뼈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고 한다.

다만 이곳 이외의 지역에서도 이따금 용의 뼈가 발견되었으며,

 

중국인들은 이를 발견하는 대로 달여서 마시거나 갈아서 가루약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용이란 생명체가 정말로 존재한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인들이 용골이라고 여기며 먹은 뼈들은 당연히 용의 뼈가 아니라 고대에 살았던 다른 동물들의 유골이었다.

 

개중에는 공룡의 화석처럼 오래된 뼈들도 있었고,

 

그렇게까지 오래되지는 않은 낡은 뼈들도 있었다. 그것이 갑골문자 발견의 단초였다.

 

갑골문자의 발견

 

중국 청나라 말기인 1899년, 북경 국자감(國子監)의 좨주(祭酒)였던 왕의영이 말라리아에 걸려 앓아누웠다.

 

그의 제자인 류어는 스승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북경 시내의 약국을 돌며 약을 지었는데,

 

구입한 용골을 갈기 직전에 그 위에 문자 비슷한 것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정말 기가 막힌 우연이었던 것이, 왕의영과 류어는 두 사람 모두 고대 문자연구의 대가였던 것이다.

한자의 서체 변화는 크게 나누어 다섯 단계로 구분되는데, 

 

대에 주로 쓰이는 해서(후한 때 출현)에서 예서(진나라 때) -> 진서(진나라 때) -> 금석문(주나라 때) -> 갑골문(은나라때)의

 

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왕의영과 류어는 용골에 새겨진 글자가 금석문보다 오래된 형태의 문자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고,

 

즉시 용골의 정확한 출처를 캐기 시작했다.

이들이 글자가 새겨진 용골을 찾는다는 소문이 퍼지자 이번에는 북경의 골동품 상인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용골의 실제 출토지가 밝혀졌을 때 중국의 모든 역사학자들은 충격을 받았다.

 

글자가 적힌 용골이 나온 하남성 안양현 소둔은 옛날부터 '은허(殷墟)' 라고 불리고 있었고,

 

사마천이 <사기> 에서 은나라의 수도가 있던 곳이라고 기록한 바로 그곳이었던 것이다.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이어진 발굴로 약 5,000점에 달하는 문자가 새겨진 거북의 등껍질과

 

소의 견갑골(어깨뼈)이 발견되었다.

 

여기서 해독된 갑골문의 내용을 통해 그때까지 역사상의 존재가 의문시되던 은나라가 실존한 왕조로 입증되었고,

 

가장 오래된 중국 문자로서 갑골문자의 존재 역시 인정되었다.

 

갑골문자에 대한 여러 이야기

 

갑골문장 대한 초기 명칭은 거북의 등껍질과 소의 뼈에 새겼다해서 귀갑수골문자(龜甲獸骨文字)였다.

 

하지만 나중에는 줄어들어 주로 '갑골문자(甲骨文字) 라고 호칭하게 되었다.

 

그 내용은 주로 은나라 왕실의 점술사가 점을 친 내용이며, 그 목적은 제사, 전쟁, 사냥, 농경, 날씨, 질병, 복점 등

 

실로 다양하다.

예를 들면 "내일 날씨가 맑을까요?" 라거나 "이번 전쟁에 승리할까요?" 등의 질문을 하고, 

 

뼈의 한쪽 면에 뜨겁게 달군 나뭇조각이나 금속 봉을 갖다 대거나 또는 직접 불에 굽는다.

 

이렇게 해서 열을 받은 뼈가 갈라지는 모양을 보고 그것으로 점을 쳤던 것이다.

 

그리고 그 점의 내용을 갑골에 기록한 것이 갑골문자이다.

하지만 불길한 괘가 나왔다고 해서 계획한 일을 취소하는 사례는 좀처럼 없었다.

 

대개의 경우 길조가 나올 때까지 점을 반복해서 쳤으며, 

 

아무리 해도 길조가 나오지 않는 경우에는 액운을 막기 위해 제물을 몇 마리 바치는 것으로 끝맺음을 하곤 했다.

 

더불어 이미 나온 점괘가 빗나가는 일도 허다했음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때 제물로는 주로 사람을 많이 썼는데, 중국 역사상 초기에는 모든 제사에 제물로 사람을 썼다.

 

하늘에 지내는 제사에는 사람을 태워 그 연기가 하늘에 닿게 했으며, 

 

물에 지내는 제사에는 사람을 물에 던졌고, 땅에 지내는 제사에서는 사람을 파묻었다.

희생으로 바치는 사람은 대부분 주변의 이민족들에게서 잡아온 포로들이었으며,

 

그러던 것이 은나라시대에 접어들어 소나 양을 바치는 것으로 대체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수많은 역사적 진상을 드러나게 해 준 것이 바로 갑골문자의 발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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