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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스토리) 드레이크의 세계일주 해적여행

by 하프투테이크 2023.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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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7년 12월 13일, 다섯 척의 영국 배가 보무당당하게 플리머스를 출항했다.

 

이 선단의 목적은 마젤란 해협을 지나 남쪽으로 내려가서 전설의 남방대륙을 찾는 것이었다.

 

'테라 오스트랄리스 인코그니타' 라고 알려진 미지의 남방대륙은 아직 유럽인들에게 발견되지 않았고,

 

서반구를 선점한 에스파냐와 동반구를 선점한 포르투갈에 맞서기 위해 영국은 남반국를 점유해야 한다는 주장은

 

영국 조야(朝野)에서 상당한 동조를 얻고 있었다.

이 선단은 남방대륙의 해안을 따라 항해하며 만난 그곳 지배자들에게 선물을 제공하며

 

유대관계를 다지라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이 선단의 진짜 임무는 탐험이 아니었다.

여왕 엘리자베스 1세와 국무대신 프랜시스 윌싱검 경은 이들에게 존재 여부조차 불확실한 남방대륙 탐색 따위는

 

집어치우고 신대륙의 에스파냐 식민지에 대한 약탈 임무를 부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령관은 악명 높은 해적, 프랜시스 드레이크였다.

 

에스파냐의 보물을 털러 가자!

 

신대륙의 발견은 유럽인들에게 막대한 보화에 대한 소식을 전했다.

 

마르코 폴로가 기록한 카타이의 전설적인 재보만큼 막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신대륙에는 유럽인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만큼의 금은보화가 있었다.

 

에스파냐의 모험가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잉카의 황제 단 한 사람의 몸값으로만

 

방 하나에 가득할 정도의 금과 은을 받아냈다.

하지만 그 막대한 보물은 콜럼버스를 신대륙에 파견한 에스파냐가 독점하고 있었다.

 

에스파냐는 먼저 도착한 자의 특권으로 모든 것을 차지했고, 다른 나라들은 그저 군침을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을 타파하려 나선 것이 바로 해적들이었다.

 

처음 대서양에서 에스파냐의 보물선을 노리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인들이었다.

16세기 초, 프랑스의 발루아 왕조와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 왕조는 이탈리아를 놓고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었고,

 

이것이 바다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보물선을 터는 것이 사업이 된다고 알려지자 곧 카리브해는 여러 나라 출신의 다국적 해적선이 우글거리는 바다가 되었다.

 

프랑스인 외에도 영국인, 네덜란드인, 에스파냐인, 혹인, 원주민 등이 함께 배에 타고 미로 같은 섬 사이의 

 

해로를 누비며 약탈할 대상을 기다리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영국인은 16세기 초만 해도 별로 볼 수 없었지만, 이 시기 그 수가 급격히 늘었다.

 

16세기 초 영국은 에스파냐의 동맹국이었지만, 16세기 중반에 진행된 종교개혁으로 인해 두 나라 사이의 거리는 

 

크게 벌어져 있었다.

 

게다가 프랑스의 경우 육지에서의 전쟁과 내전 때문에 바다에 충분한 양의 자원을 투입할 수가 없었다.

네덜란드는 동방무역의 유지와 더불어 에스파냐와의 정상적인 상업거래를 통해 신대륙의 재보를 얻을 수 있었지만

 

영국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연히 이 시기 에스파냐의 보물을 노리는 해적의 상당수가 영국인이었고 그 필두에 드레이크가 있었다.

 

카가푸에고호를 털어버린 드레이크

 

두 척의 배로 마젤란 해협을 통과할 때까지(한 척은 탈주, 두 척은 인원 부족으로 폐선) 드레이크는 

 

본격적인 해적 활동을 펼치지 않았다.

 

일찍 소문이 퍼질 경우 에스파냐인들이 경계 조치에 들어갈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태평양에 들어간 뒤에야 비로소 드레이크는 에스파냐령의 항구와 선박을 약탈하기 시작했으며,

 

태평양에 영국인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전혀 예쌍도 하지 못하고 있던 에스파냐인들은 말 그대로 날벼락을 맞게 되었다.

페루 해변에서는 은덩어리를 옆에 쌓아 놓고 잠을 자는 에스파냐인을 발견하여 보물을 빼앗기도 했고,

 

리마 항구에 들어가 돛을 육지에 올려놓고 정박 중인 12척의 배를 한꺼번에 약탈하기도 했다.

 

그리고 여기서 최대급의 대어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

 

그것이 바로 인류 역사상 최고로 유명한 보물선, 카가푸에고호였다.

드레이크는 페루와 파나마 사이를 왕복하는 이 정기선이 필리핀의 마닐라로 가게 될 막대한 보물을 싣고 출항했다는

 

정보를 리마에서 입수하자 곧바로 그 뒤를 쫓았다.

 

에콰도르 앞바다에서 따라잡힌 카가푸에고호 역시 영국인들의 습격을 받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던 터라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나포 당했고, 드레이크는 막대한 보물을 손에 넣었다.

이 배 한 척에 무려 39kg의 금과 26톤의 은, 13상자에 달하는 각종 화폐와 황금 십자가, 보석, 은식기 등

 

각종 장식품이 실려 있었다.

 

이 배 한 척에서 노획한 재보의 값어치만 해도 당시 화폐로 20만 파운드가 넘었고, 

 

이 막대한 보물을 드레이크의 배에 옮겨 싣는 데만 해도 엿새가 걸렸다.

마침내 드레이크가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가 노획한 보물의 총량은 30만 파운드가 넘었는데,

 

이것은 당시 영국 정부의 1년 세입에 버금가는 액수였다.

 

1588년 원정의 패배와 영국의 부상

 

드레이크의 세계일주와 해적행위는 일회적인 행사가 아니었다.

 

그로부터 막대한 부의 가능성을 깨달은 수많은 해적들에 의해 계속된 해적행위는 마침내 에스파냐 당국이 영국에 대한

 

전면전쟁을 결의하는 배경의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강력했던 에스파냐 해군은 연이은 전술상의 실수에다 영국의 화공, 폭풍 등으로 인해 참패하면서 

 

1588년의 원정을 비참한 실패로 마무리하게 된다.

이 전쟁으로 인해 에스파냐의 전성기와 대서양 제해권을 한방에 끝장냈거나

 

영국을 단박에 세계 최강국으로 끌어올린 것도 아니다.

 

하지만 두 나라 사이의 관계가 뒤집히기 시작한 계기인 것은 사실이며,

 

그 필두에 드레이크와 그의 세계일주 여행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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