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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스토리) 여동생과 결혼한 칼리굴라 황제

by 하프투테이크 2023. 3.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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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로마 제국에는 칼리굴라라는 황제가 있었다.

 

사실 그의 본명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로 별명인 '칼리굴라' 는 어린 시절 군사령관인

 

아버지를 따라 병영에서 살 때 병사들이 작은 군화(칼리가에)를 만들어 신기면서 즐거워했기에 생긴

 

'작은 군화' 라는 의미의 별명이었다.

하지만 정작 황제는 그 별명을 싫어했다고 한다.

 

한국어로 하자면 '꼬마 군바리' 라고 불린 셈이니 마음에 들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칼리굴라 황제와 관련된 '사람이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인' 수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만인의 기대를 받은 청년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에 이어 세 번째로 황제 자리에 오른 칼리굴라는 아우구스투스의 증손자이자 

 

티베리우스의 조카손자로, 로마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을 가지고 있었음과 동시에 게르마니아를 정복한 영웅이었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의 후광도 가지고 있었다.

 

77세의 늙은 황제와 만년의 그가 휘두르는 공포정치에 질려 있던 로마 시민들은 24세의 젊은 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가 실시한 음침한 통치에서 벗어나 신선한 기풍을 줄 것이라고 기대하며 환호를 보냈다.

 

그리고 칼리굴라는 시민들이 무척 바랐던 그 일들을 마구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돈, 돈, 돈을 써라!

 

지독하게 인기가 없었던 선제 티베리우스는 낭비를 싫어해서 꼭 필요한 사업이 아니면 절대 국가 예산을 투입하지 않았고,

 

그 결과 칼리굴라가 제위를 물려받았을 때 로마 제국의 국고는 돈으로 가득차 있었다.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가 인기가 없었던 결정적 원인 중 하나가 인기정책으로 돈을 풀지 않아서 생긴 

 

로마 시민들의 불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티베리우스가 모아 놓은 돈으로 실컷 인심을 쓰기 시작했고, 티베리우스 시절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온갖 구경거리가 로마에 넘쳐나게 되었다.

 

건설 경기를 살리기 위한 새로운 건물의 건축과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온갖 유흥,

 

시민들에게 베푸는 황제의 선물이 줄을 이었다.

 

시민들은 인심 후한 황제에게 열광했다.

 

이것까지라면 웃어넘길 수 있겠지만, 문제는 그 후의 사태였다.

 

죽을 뻔하다 살아나서는 맛이 가버린 황제?

 

즉위한 지 7개월, 가끔은 쓸모 있는 일도 좀 하고 상상할 수 있는 온갖 놀이를 즐기며 세월을 보내던 중에

 

열병에 걸린 칼리굴라는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났다.

 

그 이후로 상식의 범주를 벗어난 기행이 시작된다.

 

병으로 죽을 뻔하고 나서 어딘가 맛이 간 칼리굴라는 자기가 평범한 인간의 지위를 벗어나 신의 자리,

 

그것도 최고신 유피테르(제우스)의 지위에 올라 마땅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마치 제우스신처럼 머리와 수염을 물들이고, 황금 번개를 들고 사람들 앞에 나타나는 등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심지어 자신의 애마 인키타투스를 로마 제국의 집정관으로 임명했고,

 

대리석으로 지은 마구간을 집정관의 토가(toga) 색깔인 보라색으로 장식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칼리굴라는 많은 서커스(로마시대의 '서커스'는 오늘날과 달리,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맹수와 사람의 대결, 혹은 사람과 사람의 대결을 의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를 주최했는데,

 

여기 동원되는 사자나 곰 등 맹수들이 먹는 고기 값이 상당한 액수라는 걸 알았다.

 

이 비용을 줄이기로 결심한 황제는 짐승들에게 소나 돼지를 먹이지 않고 감옥에 갇혀 있던 죄수들을 먹였다.

 

칼리굴라의 위협은 죄수들에 그치지 않았다.

자신의 기분이 나쁘거나 자신에게 반항하는 기색을 보이는 사람들이 눈에 띄면 가차없이 죽이기 시작했다.

 

또한 투기장의 휴식시간 중에 그저 심심하다는 이유로 관중석의 한 구역에 앉은 관중들을 모조리 맹수에게 던져

 

잡아먹히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이 시기에 남긴 칼리굴라의 말들을 보면

 

"이놈부터 저기 있는 놈까지 모조리 죽여라!" . "로마에는 내가 자를 목들이 얼마든지 있다!" 라는 등

 

정상적인 정신상태인지 의심스러운 기행을 일삼았다.

 

나는 신이다! 그러니까······

 

신을 자처하고 나선 칼리굴라는 점점 더 이상해졌다.

 

그에게는 세 명의 여동생이 있었는데, 연대기 작가인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에 의하면 황제는 

 

여동생들과 근친상간을 즐겼다고 한다.

 

그런데 그 정도가 지나쳐서 황제의 얼굴을 새기는 주화에 여동생들의 모습을 새기게 하고,

 

신하들이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할 때 여동생들의 이름을 자기 이름에 덧붙이게 할 정도였다.

그중 특히 사랑한 것은 상냥하고 섬세한 성격에 고전적인 미모를 갖춘 드루실라였다.

 

다섯 살 아래의 드루실라가 21세의 나이로 죽었을 때 황제는 너무도 큰 충격에 빠져 시종도 거느리지 않고

 

수도를 떠나 시칠리아까지 가서 슬픔을 달랠 정도였다.

 

그리고 나서는 죽은 누이를 신으로 선포했다. 

 

황당한 것은, 나머지 두 여동생은 반역을 꾸몄다는 혐의로 얼마 안 가서 유배형에 처해졌다는 것이다.

칼리굴라의 호색은 누이들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

 

그는 아내를 네 명이나 맞았으며, 황궁 내의 모임에서 눈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곧바로 별실로 끌고 들어가 욕정을 채우곤 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모임 자리로 돌아와 방금 범한 여인의 남편에게 그녀와의 잠자리에 대해 큰소리로 떠드는 것이었다.

 

남편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웃어야만 했다.

칼리굴라가 신을 자처한 것은 다른 쪽에서도 문제를 불러왔다.

 

로마인이나 그리스인들이야 원래 다신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니 신이 하나 늘어난들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유이린 여호와를 믿는 유대인들에게는 하늘이 무너질 일이었기 때문이다.

 

칼리굴라는 선대 황제들이 어느 정도 신앙의 독자성을 인정해주었던 유대교도들에게 자신을 신으로서,

 

즉 여호와와 마찬가지로 숭배할 것을 강요했다.

유대인들이 이를 따를 것을 거부하고 소요를 일으키자 분노한 칼리굴라는 시리아 총독에게 명령하여 예루살렘의 

 

유대교 성전 한가운데에 자신의 얼굴을 본떠 만든 제우스 신상을 세우도록 했다.

 

만약 이 미친 명령이 실행되었다면 전 제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일치단결하여 반란을 일으켰겠지만,

 

다행히도 총독 페트로니우스는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공방 장인들에게 명령하여 신상을 만들기는 하되 가능한 천천히 만들도록 했고,

 

1년 가까이 시간을 끄는 동안 주변 신하들의 설득으로 칼리굴라가 명령을 청회하여 다행히 위기를 넘기게 되었다.

 

미쳐버린 왕의 최후

 

재위 4년이 된 어느 날, 칼리굴라는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치는 축제에서 상연된 연극을 감상한 뒤 

 

점심을 먹기 위해 황제 전용 지하도를 통해 황궁으로 가고 있었다.

 

그 순간 그를 경호하던 두 사람의 근위대 대대장들이 칼을 휘둘러 황제를 죽였다.

 

그의 아내와 딸도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고,

 

황제를 암살한 근위대장들은 칼리굴라의 숙부 클라우디우스를 새 황제로 추대했다.

정신 나간 칼리굴라의 치세는 정확히 3년 10개월 6일, 죽을 때의 나이는 28세 5개월이었다.

 

암살범인 두 대대장들은 클라우디우스에게 사형선고를 받은 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살했기 때문에 

 

살해 동기는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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