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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스토리) 흡혈귀는 정말 있을까?

by 하프투테이크 2023.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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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씨년스러운 늦은 밤, 무덤 안에 안치된 낡은 관 뚜껑이 열리고 그 안에 누워 있던 시체가 눈을 뜬다.

 

그리고 천천히 무덤 밖으로 나온 시체는 박쥐로 변해 날개를 펴고 어둠 속으로 날아간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다시 사람의 형상으로 돌아온 시체는 어느 여인의 목에 송곳지를 꽂고 피를 마신다.

 

다른 이의 생명으로 배를 채운 흡혈귀는 해가 뜨기 전 무덤으로 돌아와 다시 휴식을 취한다.

 

해가 지고 다시 자신의 시간이 올 때까지.

 

흡혈귀의 실존성

 

위에서 묘사한 내용은 현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흡혈귀의 모습이다.

 

과연 이런 이미지는 언제 유래된 것일까?

 

그리고 흡혈귀의 존재가 실제로 우리 주변에 나타나기는 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변신은 고사하고 타인의 피를 마시면서 생명을 이어가는 그런 초자연적인 생명체는 실존한 적이 없다.

단지 사람들이 그렇게 믿었을 뿐이다.

 

그럼 사람들은 왜 그런 존재를 믿었을까?

 

그것은 '피' 라는 물질이 갖는 특수성에 기인한다.

 

원시시대부터 사람들은 어떤 동물이든지 피를 흘리면 죽는다는 것을 알았고,

 

이로 인해 피가 곧 생명이라는 관념을 갖게 되었다.

이는 어느 문화권이든 마찬가지이며, 크리스트교에서 예수의 살과 피를 나누는 성찬식 역시 

 

피가 곧 생명이라는 의미에서 같은 기원을 갖는다.

 

또한 사람의 피를 마시는 수많은 괴물과 귀신에 대한 동서양의 여러 전설들도 같은 배경에서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하지 않는 괴물이자 과거의 전설인 흡결귀는 어떻게 현대 대중에게 인식되었을까?

 

현대 흡혈귀의 기원은 영국의 소설가 브람 스토커가 쓴 <드라큘라>에 있다.

스토커는 수많은 사람을 죽였던 15세기의 왈라키아(현 루마니아의 일부)에 실존했던 잔혹한 지배자이자 대공이었던

 

블라드 체페슈를 소재로 한 괴기소설을 썼는데, 잔인하기는 했어도 사람의 피를 마시지는 않았던 체페슈를 

 

관 속에서 살아가며 사람의 피로 생명을 잇는 흡혈귀로 묘사했다.

 

그리고 이를 퇴치하는 용감한 영국인들을 등장시켜 영국 독자들의 흥미를 끌었던 것이다.

 

사실 흡혈귀를 소재로 한 이런 장르의 소설은 19세기 내내 꾸준히 시장에 나오고 있었다.

따라서 브람 스토커의 소설이 이 장르 자체의 원조는 아니지만, 소설<드라큘라>가 대대적인 히트를 치면서

 

수많은 아류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또한 20세기에 접어들어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흡혈귀에 대한 새로운 전설들이 수없이 퍼지게 되었다.

 

물론 실제로 존재하는 흡혈귀 따위는 없었지만, 후대에 알려진 흡혈귀의 역사적 모티브가 된 인물은 분명히 실존한다.

 

역사 속의 진짜 흡혈귀

 

가장 유명한 '흡혈귀'의 원조는 앞에서 언급된 블라드 체페슈이다.

 

체페슈는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침략을 받았던 왈라키아 공국의 대공으로, 극도로 잔혹한 성품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는 오스만의 대사가 자기 앞에서 터번을 벗으려 하지 않자 터번 그대로 머리에 못을 받은 다음 

 

콘스탄티노플로 돌려보냈고, 포로로 잡은 3만 명의 터키인을 마뚝에 꿰어 죽이게 했다.

그것도 한 번에 급소를 찔러 죽이는 게 아니라 항문에 끼워 천천히 몸을 꿰뚫는 방법으로 

 

잔인하고 시간이 걸리는죽음을 주었던 것이다.

 

체페슈의 잔혹행위는 적국인 터키인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스만 제국과 헝가리로부터 자국의 독립을 지키고,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자국 귀족들의 세력을 꺾기 위해

 

반항하는 자는 주저없이 말뚝에 꽂았다.

여성의 경우에도 조금만 거스른다 싶으면 주저없이 처형했다.

 

심지어 귀족 부인을 평민 출신의 병사들에게 윤간하게 하거나,

 

어머니의 살을 삶아 자식에게 먹이는 만행을 저지를 정도였다.

귀족세력의 견제가 목적이라고 해도 지나치게 무도한 이런 행동으로 인해 결국 반란이 일어났고,

 

체페슈는 헝가리 왕에게 잡혀 10년간 투옥되기에 이른다.

 

그 뒤 정세 변화에 따라 풀려나 다시 왈라키아 공으로 복위하기는 했으나 얼마 못 가 오스만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

 

소녀의 피를 짜 모은 백작부인

 

체페슈만큼이나 유명한 흡혈귀의 실제 모델로 헝가리의 바토리 에르제베트 백작부인이 있다.

 

그녀는 왕실의 친척이기도 한 명문 귀족이었으나 기나긴 독수공방의 무료함을 달래는 데 높은 신분은 아무 가치도 없었다.

 

자주 보지는 못해도 부부간의 금술은 좋은 편이었던 그녀의 남편 나데스디 백작은

 

잔인하면서도 용맹한 군인으로 용명을 떨쳤는데, 이는 곧 늘 전쟁터에 나가 집을 비우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녀의 지루한 삶은 1604년에 남편이 전사하면서 더 따분해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머리 손질을 잘못한 시녀의 뺨을 때렸을 때 얼굴에 난 피가 그녀의 손에 묻은 것이 화근이 되었다.

 

40대에 접어들어 자신이 늙어간다고 생각하며 초조해하던 백작부인의 눈에 피가 묻은 피부가 그전보다 매끄럽고

 

젊어진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날 밤 백작부인의 시종들은 공포에 떠는 시녀를 지하실로 끌고 가 백작부인이 보는 앞에서 죽이고 피를 짜냈다.

 

시녀의 피로 세수를 한 그녀는 한층 젊어진 기분을 느끼고 크게 만족했다.

그날 이후로 젊음을 유지하기 위한 백작부인의 처녀 사냥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거성인 체이테 성 주변 농노의 딸들이 표적이 되었다.

 

늘 가난에 시달리던 농노들은 백작부인이 시녀를 구한다는 이야기에 기꺼이 딸을 성으로 들여보냈다.

 

하지만 성으로 한번 일하러 들어간 처녀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고, 성에서 찾는 시녀의 수요는 끝이 없었다.

 

마침내 농노들이 스스로 딸을 내놓지 않게 되자 백작부인은 시종들을 내보내 소녀들을 납치해 오게 했다.

납치할 소녀를 찾아 밤길을 달리는 검은 마차는 인근 마을에서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마침내 인근 농가의 소녀들이 씨가 마를 지경이 되자 백작부인은 피를 얻기 위해 귀족 가문의 처녀들까지 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성 안에 귀족 가문 아가씨들을 위한 여학교를 설립하고 입합생을 받았는데,

 

이들도 그녀의 젊음을 보전하기 위한 제물이 되었던 것이다.

 

그녀의 제물이 된 소녀들은 대부분 잔혹한 고문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녀가 즐겨 사용했다고 하는 고문법으로는 사방에 강철 칼날을 단 새장에 기절시킨 희생자를 

 

나체로 넣어 매다는 것이 있었다.

 

깨어난 처녀가 몸을 움직이면 칼에 찔리고, 고통에 몸부림칠수록 더 많이 찔려 피를 흘리게 되는 것이다.

 

백작부인은 그 밑에서 쏟아지는 피로 샤워를 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처녀들의 전신을 바늘로 찌르고 눈위를 굴리며, 아예 기계에 넣어 온몸을 난자하고 피를 받아내기도 했다.

 

그렇게 모은 피는 욕조에 채워 백작부인의 목욕에 쓰였다.

 

범행 초기에는 희생자의 시체들을 제대로 묻었지만 차츰 범행이 지속되자 시체들은 성 내외에 아무렇게나 버려졌다.

 

마침내 한 명의 소녀가 성을 탈출하면서 그간의 소문이 퍼져나가기 시작한 뒤에야 

 

비로소 백작부인의 성을 수색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1610년에 왕명을 받은 조사단이 체이테 성으로 들이닥쳤을 때, 

 

그들은 수많은 시체가 성밖은 물론 성 안 여기저기에 묻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지하실에는 아직도 피가 흐르는 시체와 살아 있는 희생자가 수십 명이나 남아 있었다.

 

명문 중의 명문 출신인만큼 이런 짓을 저지르고도 하인들만 처형되었을 뿐 백작부인은 사형을 면했지만 

 

창문도 없는 방에 무기한으로 감금되었고, 3년 뒤 사망했다.

 

이처럼 잔혹한 그녀의 행동 역시 후세의 흡혈귀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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